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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좀도리 항아리

2024-09-25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좀도리 항아리
'글. 박종희'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에 박물관에 도착했다. 경주에 오면 눈깔사탕과 곶감을 갈무리해 두던 외할머니의 속곳처럼 신기하고 내밀한 옛날이야기를 만날 것만 같아 가슴이 설렌다.
    이천여 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축약해 놓은 국립경주박물관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시대로 걸어 들어서는 것 같아 신비스러웠다. 동궁과 월지모형을 눈에 담고 이끌리듯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월지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능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부장품들이 많지만,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통일신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활용품도 많았다. 





    정교하게 빚은 제사 용기와 화려한 불교 유물 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당연 큰 항아리였다. 세상에, 항아리가 이렇게 크다니. 
    사람의 키만 한 이 항아리는 주로 곡식이나 물을 저장하던 항아리인데, 목 부분에 새겨진 十石入瓮(십석입옹)은 열 사람의 식구가 겨울을 나려면 항아리 8개분의 식량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명문대옹에는 10석이나 되는 식량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큰 항아리지만 곡식 10석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큰 항아리가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다니. 흙을 고르고 치대어 모양을 빚고 초벌구이를 한 후 다시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구워 항아리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스며들었을까. 
    항아리 앞에 서니 항아리 안에 숨어 있을 전설이 궁금해졌다. 종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스러워 인신공양의 설화가 생긴 에밀레종처럼 이 항아리에도 내밀한 예방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항아리가 물이 새지 않고 곡식이 썩지 않도록 흙의 심장에 혼과 숨결을 불어넣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 시절에 가뭄이나 전쟁을 대비하여 명문대웅에 식량을 비축했다는 선조들의 지혜와 현명함에 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보관하기조차 어려웠을 항아리에 균열이 생긴 것을 보니 친정어머니가 쓰던 항아리가 생각났다. 친정집에는 어머니가 아끼던 좀도리 항아리가 있었다. 외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하니 항아리 나이가 어림잡아도 100살은 족히 되었을 성싶다. 
    좀도리 항아리는 그 어렵다던 보릿고개를 견딘 선조들의 절약정신이 담긴 항아리였다. 쌀을 절약한다는 뜻의 좀도리는 우리 집에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술병처럼 항아리 주둥이가 좁아 뭐든 한 번 들어가면 꺼내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한 줌씩 덜어 좀도리 항아리에 쟁여두었다. 이남박에서 쌀을 덜어내지 않고 밥을 해도 여덟 식구가 배불리 먹지 못할 텐데 어머니는 왜 매번 쌀을 덜어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항아리에 쌀이 가득해지면 어머니는 보물단지라도 챙기듯이 보자기에 싸서 나가셨다. 교회에 가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끼니마다 한 줌씩 모은 쌀은 교회에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 쓰였다. 목사님은 어머니가 가져간 쌀을 소녀 가장이나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한테 나누어주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참, 철없고 옹졸하게 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좀도리 항아리를 들고 나서면 우리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왜 교회에 쌀을 갖다 주느냐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한 숟가락씩 덜어 열 숟가락이 되면 한 사람의 끼니 해결이 된다고 하셨다. 우리가 한 숟가락만 덜 먹으면 배곯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좀도리 항아리에 쌀을 덜 때도 항상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오늘은 큰아들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 덜었다며 장남의 앞날을 위해 기도했고. 내일은 큰딸의 건강을 빌었다. 그렇게 육 남매의 밥그릇에서 쌀을 덜어내는 동안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육 남매는 어머니의 기도에 어긋나지 않게 잘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모두 무탈하게 사는 것도 사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한 어머니 덕분이지 싶다.
    비록 항아리의 크기는 다르지만 명문대옹과 좀도리는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앞날을 걱정하여 비축한 식량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거나 굶주리는 이들을 도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량형도 모르던 그 옛날에 명문대웅을 만들어 식량을 보관한 것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신 선조들의 혜안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전쟁과 가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손으로 만져볼 수는 없지만 명문대옹의 내력을 눈으로 읽어본다. 안압지에서 나왔으니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견디어낸 항아리인가. 좀도리 항아리가 굶주린 이들에게 따뜻한 밥이 되어주었듯이 명문대웅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었을까. 
    사람의 온기가 떠난 항아리는 쉬이 늙는다. 어머니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던 항아리도 친정어머니가 떠나고 나서는 쇠해졌다. 쓸모를 다하고 달의 뒷면처럼 속살을 숨기고 서 있는 명문대옹은 값지게 청춘을 보낸 어른의 모습 같다.
    선조들의 삶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살아온 항아리에서 밤마다 얼마나 내밀한 이야기들이 웅성 거릴까. 억겁의 시간을 품은 명문대옹에서 신라인들의 정취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10석이나 되는 식량을 비축해 한겨울을 날 수 있게 했던 명문대옹이나 좀도리항아리처럼 사람의 가슴에도 온기를 품어 어지러운 세상을 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