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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의 名家 ‘박동수 수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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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구두’ 하면 흔히 이탈리아를 떠올리지만,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명품 수제화를 만드는 곳이 우리 청주에도 있다. 수십 년간 장인의 손때를 간직해 온 수제화의 명가 ‘박동수 수제화’가 바로 그곳이다. 요즈음은 ‘슈즈 홀릭(shoes hollic)’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구두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한 땀 한 땀 구두 옆면은 갈색 실선 무늬로 물들고, 뜨거운 인두는 황색 가죽을 더욱 고풍스럽게 만든다. 손때 묻은 진짜 명품이 있는 곳, 숨은 장인의 손길이 다가오는 봄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고 있다.
‘박동수 수제화’ 박동수 대표는 “발은 우리 몸의 가장 아래에서 우리 몸 전체를 지탱한다. 1km를 걸을 때마다 발은 12톤가량 압박을 받는다고 한다.”라며 “구두는 발이 받는 이런 압박을 줄여주고 발의 건강을 지켜준다. 그래서 편안하면서 품위있는 구두를 만들어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한다.


3년 만에 ‘선생’의 경지에 도달
“사람의 운명이란 묘하다. 큰형 친구의 권유로 대구의 유명 제화점이었던 ‘골든제화’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것이 평생의 직업이 될 줄은 나도 알지 못했다. 남들은 5년 정도 걸리는 소위 ‘선생’의 경지를 난, 3년 만에 올랐다. 운명처럼 그때 구두는 내게 다가왔다.”
구두업계에서 처음 일하는 사람은 하견습, 그 다음이 중견습, 마지막이 상견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모든 위치를 뛰어 넘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모두 ‘선생’이라 불렀다. 박대표는 약관의 나이 스무살에 바닥을 만드는 ‘제부’와 갑피를 만드는 ‘제갑’을 모두 통달한 선생의 경지에 올랐다. 내친 김에 박대표는 1년 만에 다시 숙녀화도 더불어 익혔다. 그의 성실함과 뛰어난 구두실력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그의 선택은 대구 최고의 번화가인 동성로에서 구두점을 운영하는 고향 선배였다. 그가 만들어낸 구두는 그곳에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표인 고향 선배가 도박에 빠져든 것. 그 모습에 실망을 한 박대표는 독립을 결심했다. 26살에 창업한 ‘솔로몬제화’였다.
“그 당시 ‘대구의 여대생이 솔로몬제화의 구두를 신지 않으면 유행에 뒤진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만드는 구두마다 족족 팔려나갔다. 구두공장도 확장하며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직원이 무려 40여명에 이르렀다.”
하늘의 시샘이었던가. 거칠 것 없던 그의 성공가도는 건물주의 부도로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맛본 실패였다. 하지만 박대표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뚜기처럼 재기를 꿈꿨다. 그곳이 바로 청주였다. 청주는 그에게 재기의 땅이며 약속의 땅이었다.



한 번 신으면 꼭 단골이 되는 신발, 박동수 수제화
“청주는 내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94년 스페셜 제화점을 내면서 흥업백화점에 입점을 했다. 처음에는 이름 없는 메이커라고 인정을 하지 안했지만, 오픈하자마자 6개의 구두브랜드 중 ‘박동수 수제화점’은 향상 1위를 고수했다.”
92년 흥업백화점에 이어 진로백화점에 오픈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박동수 구두’는 고객들의 가슴에 서서히 명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 번 신어본 고객은 박대표가 만든 구두만 찾았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다시 찾아왔다. 98년 IMF로 흥업, 진로백화점이 연이어 부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 이상했다. 부도가 나기 시작하면서 다시 망했지만, 처음의 실패와는 달랐다. 폐허 같던 내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단골들이 찾아왔다. 구두를 만들어 달라는 단골들의 말은 내게 다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부도로 가진 재산을 모두 잃었지만, 고객들의 신뢰는 조금도 잃지 않았다.”
지금의 ‘박동수 수제화’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순전히 고객들의 성원 덕이었다. 백화점에 있던 구두들을 창고 같은 매장에 옮겨놓았더니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화려한 매장이 중요하지 않았다. 고객들에게는 오직 ‘좋은 구두’면 족했다. ‘박동수 수제화’는 이미 고객들이 명품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박동수 수제화 10년 단골이라는 서명훈(54)씨는 “박동수 수제화 구두는 한 번 신으면 최소 10년은 신는다. 오래 갈수록 품위가 있고 나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구두다. 그래서 아무리 낡아도 차마 버릴 수 없어 늘 신발장에 보관한다.”라며 “지구상에 나만의 구두를 갖고 싶다면 이리로 오면 된다. 20년이 흘러도 명품으로 간직할 수 있는 구두를 신고 싶다면 이곳 박동수 수제점으로 오면 된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진정한 마이스터(匠人), 박동수
햇살이 완연한 봄임을 먼저 알려주고 있었다. 봄볕에 반짝거리는 구두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박대표는 “구두는 우선 좋은 가죽을 써야한다. 생후 5개월된 소가죽은 ‘카푸’ 30개월 미만은 ‘키퍼’다. 그 이상의 가죽은 ‘성우’라고 하는데 우리는 카푸와 키퍼만 쓴다.”라며 “무엇보다 구두는 편안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행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고 세련되어지는 구두를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다.
한평생을 구두와 함께 살아온 박동수 대표다. 구두 만드는 일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겠나. 일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구두는 어쩌면 내 삶의 스승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구두 마이스터(장인:匠人)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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