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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바람의 생각을 그리는 사람 - 우은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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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을, 홀로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느낌은 어떨까. 그의 그림 속으로 산책하다보면 저절로 그 느낌이 달빛처럼 흘러든다. 요요한 달빛과 바람을 그대로 그림에 부숴 넣은 작가는 틈나는 대로 밤의 산길을 걷는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그는 걷고 또 걷는다. 매일 밤마다 백리를 걷는다니, 쉬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달빛과 바람이 좋은 5월이면, 그는 속리산 문장대를 중심으로 반경 백리를 둥글게 그려 상주와 보은 주변을 밤새워 걷곤 했다. 잠시 걸기를 멈춘 그가 말한다.



“어려서부터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 있길 좋아했고 일찍이 우리나라 여러 곳을 걸어 다녔다. 청년이 되고부터는‘생(生)의 가장 아름다운 날에 바람을 드로잉함’을 생의 방편으로 삼아 회화 작업을 하게 됐다.”
새롭게 둥지를 튼 금천동 화실에서 늦은 저녁, 그를 만났다.



밤길, 삼천리를 걷다
-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나?
- 우은정 화백 : “대부분의 현역 화가들은 초, 중, 고등학교 때부터 화가의 꿈을 갖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초를 공부하고 미대를 진학하여 화가의 길을 걷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것은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받았던 것 같다.”
- 우화백의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왔다. 그림의 주된 관심사는 늘 변하나.
- 우은정 화백 : “나 같은 경우에는 개인전 때마다 관심사가 바뀌었다. 첫 개인전부터 5회 개인전, 즉 2000년까지는 주로 인체에 관심이 있었다. 그 인체에서도 무기력한 청년들의 형상에 생각과 시선을 모았다. 무기력한 청년들의 모습…그리고 이때는 ‘하찮은 것과 거룩한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설화’(說畵, 카로잉 Carowing 카툰+드로잉)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습작을 했다. 그 과정 중에서 이야기를 구운몽에서 빌려오기도 했고, 김수로 왕 탄생설화에서도 때론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직접 삼천리 이상의 밤길을 걸으면서 몸으로 체험한 것들을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라는 주제로 그렸다. 지금은 ‘길 위에 달빛으로 서서’를 습작 중에 있다.”
- 왜 그림을 그리나?
- 우은정 화백 : “나는 화가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은 싫어도 그려야 한다. 왜냐하면 유희가 아닌, 유일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 생계는 어떻게 꾸리면 사는지. 그림을 팔아서 사는가?
- 우은정 화백 : “그림이 팔리면 정말로 신이 난다. 그 돈으로 재료도 사고 생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 시간이 없고 그 길도 모른다. 난 어렸을 때부터 그림 말고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잘 팔리는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좋아하고 세계의 그림을 그릴 뿐이다.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한테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를 지독하게 심심하게 만들어야
- 중앙무대에 진출하는 욕심이 없는지. 굳이 이곳 청주만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 우은정 화백 : “중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머무는 이곳이 소우주다. 청주에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이곳이 중앙이고, 천하가 아닐까. 서울에 가면, 다시 뉴욕이나 유럽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30년 이상 그림을 그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주 단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활이 단순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단순하고자, 청주를 고집한다.”
- 단순(單純)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림이 단순할 수 있는가…그림 속에도 철학이 있고, 또한 삶도 있는 것이 아닐까.
- 우은정 화백 : “단순하다는 의미를 쉽게 풀어보자. 위대한 예술적 성과나 과학적 진보를 이룬 사람들의 삶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들은 연구실과 집, 집과 작업실밖에 몰랐다. 그들의 단순함이 결과적으로 인류에 공헌한 셈이다. 나를 단순하게 만들고, 지독하게 심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심심함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 심심하다보면 무언가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이 내게는 그림이다. 돈은 편안함을 준다. 또한 돈은 단순한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그림 그릴 물감과 붓 그리고 최소한의 양식만 있다면 된다.”
- 우화백에게 그림(예술)은 무엇인가?
- 우은정 화백 : “그림(예술)은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다. 저항은 내적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저항하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되지 않았는가. 돈은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삶은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아주 단순하게 사니, 생활비도 적게 든다. 그래서 그 자유로움 안에서 내 식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밤길을 혼자 걷다보면 뜻밖의 마을을 만나게 된다. 휘영청 달빛 속에 빛나는 마을의 모습이‘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붉은 적송의 줄기위로 노란 꽃잎이 흩날린다. 꽃잎은 달의 잎이며 숨결이다. 텅 빈 마을에 달의 잎과 숨결이 흩날리는 풍경 속을 산책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이 생(生)의 것이 아닌 듯하다.
우화백이 머무는 화실에는 온통 바람과 달빛만이 가득했다. 방안 구석에 오래된 전축위로 천천히 LG판이 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시간(時間)과 다르게 자기의 시간을 따로 갖고 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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