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옛날 다방
'글.박종희'

‘노스탤지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모든 것이 마냥 그립다.
가끔 만나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 탓에 모임 한 군데 들지 않던 내가 우연한 기회로 소모임에 들어갔다. 얼마 동안은 적응되지 않아 후회스럽기도 했는데 글을 쓴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몇 번의 모임에 참석하고 나니 소속감이 들고 책임감도 생겼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데 다들 오셨다. 깔끔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으며 밀린 이야기와 근황으로 조용한 수다가 시작되었다. 올해도 유적지 탐방 일정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다 보니 이야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이 들어도 여자들의 대화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한쪽에서는 주름이 늘어 고민이라고, 다른 탁자에서는 손주들의 재롱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기세다. 회의를 마치겠다는 회장님의 말씀에 아무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늘 집에 가기 싫으신가요?”라고 하시면서 회장님이 먼저 일어나신다.
해가 길어져서인지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 아직 밖이 환하다. 서둘러 가실 것 같던 회장님이 아직 한낮 같은데 찻집에 가서 차나 한잔하자며 회원들을 이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오래된 찻집이 있어 들어서니 한방차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차 달이는 냄새가 좋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찻집에 대한 예찬으로 소란스럽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요즘은 보기 드문 그야말로 옛날다방 같다.
시대에 발맞추어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멋진 커피숍 때문에 밀려난 옛날다방 주인이 혼자서 주문받고 차를 달인다. 낡아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소파와 의자 몇 개 놓인 다방의 주인 여자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여자들이 반가워 입을 다물지 못한다. 커피도 맛있지만 오래도록 달여서 거른 냉 대추차가 맛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대여섯 명이 넘는 회원들이 모두 냉 대추차를 시켜놓고 나니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아날로그 찻집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80년대 초였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인가. 그 시절엔 음악다방이 많았고 디제이가 있었다. 텁수룩한 장발 머리 디제이들이 멋진 목소리로 음악을 배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다방에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보다 디제이를 보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남방셔츠를 입고 음악을 선곡하는 디제이한테 빠져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그 친구는 결국 디제이와 결혼까지 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방으로 퇴근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 시간 때문이기도 했지만, 목적은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버스 시간을 핑계 삼아 책 한 권 들고 도서관처럼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나를 위해 한구석에 내 자리를 비워두던 주인이 고마웠다.
단지, 나를 배려해서였을까? 50명이 넘는 직원들이 아침마다 시켜 먹는 모닝커피가 다방매출에 노른자위라는 것을 계산 빠른 주인 여자가 모를 리 없었으리라. 눈썰미 좋은 주인의 배려 때문인지 내가 들어가면 음악도 바뀌었다. 고맙게도 책을 읽으며 신청했던 음악을 기억하고 틀어주었다.
빽빽한 레코드판에 둘러싸여 있는 어두운 디제이 방 안에서 웬만한 성우만큼 목소리가 근사하던 그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까. 디지털 시대이니만큼 하얀 흰머리 대신에 멋진 아바타 모습으로 인터넷카페에서 음악을 배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원두커피가 주메뉴가 되어버린 요즘엔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어 달착지근하게 끓여주던 다방 표 커피도 그립다.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시대를 추억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시간을 돌려놓은 것 같다. 십여 년 이상의 나이를 뛰어넘는 세대인데도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연세 드신 선생님들도 디제이를 좋아했다고 입을 모았다.





주인 여자가 자랑하던 냉 대추차가 오니 시끌벅적하던 대화가 잠시 중단된다. 대추를 잘 달여 잣을 동동 띄운 대추차에서 풍기는 향기가 차 색깔만큼이나 진했다. 원래 대추를 즐기지 않는데 대추차의 은은한 향에 끌려 한 모금 마셔보니 달콤하고 깊은 맛이 입에 착 붙는다.
대추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 난 소감을 놓칠세라 모두 한 마디씩 대추차에 대한 자랑이 늘어진다. 무엇에든 의미를 붙이길 좋아하는 문인들만의 변명이다. 먼 길마다 않고 나온 J 선생도 대추차가 맛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모임이 아니면 앞에 계시는 분들이 얼마나 어려운 분들인가.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할머니가 되어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선생님들처럼 고운 모습으로 글을 쓸 수 있을는지. 만년 소녀 같던 친정어머니처럼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지. 대추차와 함께 무르익는 수다로 밤이 깊어만 간다.

EDITOR 편집팀
박종희 작가
이메일 : essay0228@hanmail.net
2000년 『월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전국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김포문학상
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제1회 119 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2008년 ~ 2019년까지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저서: 수필집 『가리개』『출가』
한국작가회의, 한국산문작가협회, 충북작가회의 회원
청주시, 세종시 수필창작 강사.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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