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2.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운천동 절터가 소재한 곳은 본래 연당리 마을 동편으로 1914년에 운천리로 통합되었다. 이곳의 절터에 대해서는 문헌의 기록이나 전설이 없어 알려지지 않았는데, 1970년 4월 10일에 우연히 동종이 발견되면서 절터임을 알게 되었다. 동종의 발견 상황에 대하여는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의 김영배 관장이 간단한 보고서 형식의 논문을 써서 『고고미술』 105호에 실었다. 그때의 지번으로 운천동 376-1번지에 사는 집주인 최용문 씨가 신축 가옥의 조립식 담장을 설치하기 위해 기둥을 묻을 구덩이를 파던 중에 작업 도구에 쇠붙이 닿는 소리가 나서 조심스레 파보니 동종이 나왔다고 한다. 동종은 지표 아래 약 70㎝에서 눕혀진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동종 안에는 금동보살입상 1점, 청동금고 1점, 향로 2점, 놋그릇 2점이 들어 있었는데, 향로와 놋그릇은 부식이 심하여 원형을 알기 어려웠으나 동종과 불상과 금고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우수작에 속한다고 하였다. 한편, 발견 지점 일대에서는 많은 기와 조각과 고려청자 조각들이 흩어진 채 발견되어 예전에는 절이 있었던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유물들은 바로 청주시에 매장유물로 신고하여 그해 10월 29일부로 국가귀속 처리되었다.
동종이 발견됨에 따라 운천동 일대가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나도 이 절터를 가끔 답사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1982년에는 주민의 제보로 산직말 어귀 공동우물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신라 사적비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비로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옛 산직리(山直里) 마을 입구의 운천동 449번지에서 발견되어 충북대 차용걸 교수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수백 년 동안 빨래판으로 사용된 듯 겉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물을 뿌리며 판독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어느 사찰에 관련된 사적비로 확인되었다. 많은 글자가 판독이 불가하도록 마모가 심하여 전체의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불법을 찬양하고 국왕의 덕을 칭송하며 삼한 즉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왼쪽 둘째 줄에 새겨진 수공(壽拱) 2년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연호인 수공(垂拱)과 같은 것으로 보아 686년(신문왕 6)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었다. 685년에 청주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으니 바로 다음 해에 운천동에 절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지배세력이 청주지역, 특히 운천동 일대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이 사적비가 발견되고 얼마 후에 나는 운천초등학교 옆 무심천 도로에서 불상이 조각된 석탑의 옥신석 1개를 발견하여 도청에 알렸는데 며칠 후에 다시 가보니 다른 대학교 박물관에서 가져갔다고 하였다. 이들 모두 운천동 일대에 많은 사찰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청주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평화로운 농촌으로 천변의 특성상 채소밭이 많았던 운천동이 1984년에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상전벽해가 이루어졌다. 청주에서는 처음으로 시행된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었다. 지금은 개발행위를 하려면 필수 사항으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그 넓은 지역을 개발하면서 지표조사도 하지 않았다. 다만, 1970년에 동종이 발견되어 절터로 알려진 최용문씨 집 주변만 발굴조사를 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이 발굴조사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맡게 되었고, 나는 발굴조사원으로 참여하여 현장을 진행한 후 보고서까지 큰 인연을 맺었다.

운천동사지와 주변 모습(1984. 11.)



발굴조사는 1984년 11월 28일에 시작되었는데 주변은 이미 택지조성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발굴 기간과 범위에 제한적이었고, 주변이 매우 산만하고 중장비가 흙먼지 날리며 거칠게 내달리는 위험한 상황이라 정해진 범위 외에는 조사가 불가하였다. 발굴을 시작하자마자 이른 추위가 닥치고 눈보라 치는 날이 많아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12월 21일까지 1차 조사를 마치고 철수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10일부터 5월 20일까지 2차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발굴 결과 사찰의 구조는 남북 일직선 위에 금당과 탑, 중문이 자리하고 주위에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인 가람 형태로 확인되었다. 중문은 남쪽 회랑과 동일 건물의 중심부에 출입문을 낸 형태로 기단 축대와 초석들이 잘 남아 있었는데, 이 터에 안동권씨 집안에 시집온 인동장씨의 열녀각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지하 유구가 덜 훼손되었다. 여담이지만, 안동권씨 문중에서는 열녀각을 다른 곳에 옮길 계획이라며 정려에서 떼어낸 명정편액을 잠시 우리 박물관에서 맡아달라고 해 보관하고 있는데 40년이 지난 아직도 찾아가지 않고 있다.
절터의 금당지는 최용문 씨의 가옥이 자리하였던 곳이어서 기단과 초석들이 모두 유실되었는데 다행히 초석을 받쳤던 적심이 확인되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만, 어른 주먹 크기의 자갈돌 적심과 그 후대의 자연석 적심이 겹쳐진 것으로 보아 몇 차례 중창이나 개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금당지 서편에서 불에 탄 기와들이 무더기로 출토된 점으로 보아 후대 건물은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음을 보여준다.
절터의 외곽을 둘러싼 남쪽 회랑과 동쪽 회랑 터가 확인되었다. 남회랑은 정면 9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좌우로 긴 건물의 중심 1칸은 중문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확석 즉 대문의 하부 촉을 받치던 돌이 원위치에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동회랑은 심하게 훼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범위로 보아 대략 7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탑이 있던 자리 역시 훼손이 심한 상태이긴 하나 남단부가 약간 남아 있고, 주먹 크기의 냇돌 적심이 확인되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운천동사지 발굴 후 전경(1985. 5.)
사역의 둘레에는 돌담장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그 내부의 면적은 대략 2,100㎡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하의 유구가 심하게 교란되고 중복되어 있어 2~3회 정도의 중수 내지는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사찰의 존립 시기는 이곳에서 발견된 동종과 발굴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말기에 폐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절이 어떻게 폐망하였고, 동종이 어찌하여 땅속에 매장되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 동종은 물론이고 인근의 흥덕사지나 사뇌사지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들도 모두 일정한 장소에 인위적으로 매장되었던 것으로 밝혀져 그 궁금증이 더하다. 사찰에서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겨 사용하던 중요 기물들을 한 곳에 묻어 두는 것을 퇴장(退藏)이라 하는데, 운천동 일대의 절터들이 하나같이 퇴장 유물에 의해 확인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3부에서 계속>

EDITOR 편집팀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전화 : 043-219-1006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상당로 314 청주첨단문화산업단지 2층
홈페이지 : www.cjculture42.org
청주문화도시조성사업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