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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100」따라가기
‘눈물의 여왕’도 울고 갈 세기의 결혼? 무왕의 러브스토리부터 미륵신앙까지
'익산 미륵사지'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재벌가 3세 홍해인과 시골 마을 용두리 이장 아들 백현우, 두 주인공의 ‘세기의 결혼’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이미 1400여 년 전 이를 능가하고도 남을 세기의 결혼이 있었다. 마를 팔던 소년 가장에서 훗날 백제의 무왕(武王, 600~641)이 된 서동(薯童)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다. 향가 ‘서동요’와 ‘삼국유사’ 등을 통해 익숙한 이 백제 무왕의 이야기를 가장 쉽게 만나려면 무왕의 고향으로 알려진 익산, 그곳에서도 미륵사지로 가면 된다.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의 고도(古都)인 공주·부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중심축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로컬100’ 중 ‘지역문화유산’에도 이름을 올렸다.

익산 미륵사지 ‘서연못 포토존’에서 바라본 미륵사지석탑(왼쪽)과 동탑 (사진. C영상미디어)




삼국시대 역대급 로맨스?
익히 알려진 ‘삼국유사’ 속 무왕 탄생의 설화는 이렇다. 백제에서 마를 팔던 소년 가장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 ‘서동과 선화공주가 서로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동요(향가)’를 지어 백성에게 퍼뜨린다. 노래가 현실이 돼 서동은 선화공주와 마침내 결혼하고 이후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배경 설화가 후대인에게 이토록 강렬하게 각인돼 전해지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할 만한 러브스토리였기 때문이다. 인문서 ‘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를 펴낸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이자 건축가 김봉렬 소장은 익산 백제역사유적을 두고 ‘로맨티스트 무왕의 왕궁과 사찰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설화의 진위를 떠나 그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일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무왕 때 지어져 백제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최대 가람(伽藍) 미륵사가 자리했던 터다. 무왕이 백제 부흥의 꿈을 담아 지은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북서쪽으로 5㎞ 남짓 떨어진 금마면 미륵산 아래에 자리한다. 금마면은 고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의 새로운 터전이자 마한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지역이다. 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 팔던 마가 특산품이다.
미륵사지를 두르고 있는 일대의 산을 ‘용화산’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만 미륵산이라 부르고 그 나머지는 용화산이라고 한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미륵사는 백제 불교의 구심점이 미륵신앙이었음을 보여주는 곳으로 평민까지 용화세계(龍華世界, 미륵불의 정토)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에 바탕을 두고 지어졌음을 추측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삼국유사’ 속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무왕과 무왕의 왕비가 등장한다.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이 솟아올라 이를 모시기 위해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를 비롯해 왕궁리 유적,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자 백제의 마지막 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 등은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여행의 한 축이다.

국립익산박물관 전시실의 미륵사지 복원 모형 뒤로 복원 영상이 펼쳐져 미륵사의 실물을 추정해볼 수 있다.


폐허 아닌 백제의 수장고
오랜 기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미륵사는 대지 면적이 16만 5289㎡(5만 평)가 넘는다.
미륵사지의 중심 사역(寺域)만 2만 6446㎡(8000평)에 달한다. 규모로만 따지면 동아시아 최대 수준이다. 하지만 140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광활한 대지에 두 개의 연못과 당간지주, 석탑 그리고 터를 두르고 있는 미륵산이 전부다. 잃어버린 왕국의 ‘폐허’일 뿐이라고 무상함을 느끼기엔 이르다. 미륵사지는 백제의 또 다른 수장고나 다름없다.
입구에서 천천히 미륵사지 중심부를 따라 미륵산 방향으로 걸으면 연못을 만난다. ‘서연못’이라 쓰인 포토존에 서면 동서 두 개의 탑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못 너머로는 사찰 입구를 알리는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그 뒤로 동서 두 개의 탑과 미륵산이 원근감 있게 펼쳐진다. 이를 시작으로 여백의 공간에 역사적 상상을 더해가다 보면 백제의 미학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의 미륵사가 하나씩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서쪽, 미륵사지석탑으로 향한다. 한쪽이 반파돼 흘러내린 듯한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창건 시기(백제 말 무왕 639년)가 밝혀진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자 문화재 보수와 복원의 역사를 새로 쓴 유물이다. 본래 7~9층 석탑으로 추정하나 현재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다. 높이는 약 14.2m다.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제에 의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응급처치 상태로 전해졌다.
이후 2001년 해체조사에 들어가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됐다. 이 과정에서 2009년 극적으로 1층 심주석에서 금제사리봉영기(사리봉안기) 등 관련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건립 연대와 창건에 얽힌 수수께끼가 밝혀졌다. 오랫동안 미륵사 창건 설화 속 왕비가 선화공주라는 게 정설처럼 여겨졌으나 금제사리봉영기 기록에 따라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이가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는 게 밝혀지며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사택왕후는 무왕의 여러 왕비 중 한 명이었다’는 등의 해석이 여전히 분분하지만 탑은 그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녹유를 바른 서까래기와가 출토된 것도 미륵사만의 특징이다.




잃어버린 왕국이 남긴 메시지
미륵사지 석탑을 시작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동원 구층석탑, 크고 아름다운 목탑이 자리했을 목탑지와 금당지 등을 둘러보며 미륵사의 규모를 가늠해봤다면 미륵사의 실물을 시뮬레이션해볼 차례다. 국립익산박물관으로 가면 된다. 미륵사지 발굴 유물 2만 3000여 점과 인근 왕궁리 유적지 등에서 발굴된 유물이 짜임새 있게 전시돼 있다.
박물관 로비에 옮겨 설치된 발광다이오드(LED) ‘미디어 월’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미륵사의 창건 과정부터 3차원(3D) 복원데이터를 활용한 미륵사의 본래 모습까지 영상으로 재현했다. 특히 삼국유사에 기술된 창건 설화를 바탕으로 미륵사 창건 모습도 담았다. 상설전시실에선 미륵사 조감도를 시작으로 백제 건축미와 기술을 집약한 미륵사가 스크린을 통해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 유약을 발라 구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미륵사지 서까래 기와, 미륵사지석탑의 속 깊은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를 비롯해 사리호, 청동합 등 9점으로 이뤄진 사리장엄구(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된 공양물)는 박물관이 추천하는 ‘꼭 봐야 할 국립익산박물관의 필관(필수관람) 유물’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금제사리봉영기 뒤로는 앞면 99자, 뒷면 94자의 글자가 영상으로 흘러 관람의 몰입도를 높인다. 디지털 실감 영상관 ‘미륵사지 기록집’에선 발굴과 관련된 사진, 영상자료뿐 아니라 문화재 보수·발굴 전문가들이 대화하듯 숨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시물도 기다린다.
전시의 마지막 코스는 ‘백제가 남긴 긴 여운’이라는 영상 관람이다. ‘폐허에도 역사가 있다’는 메시지에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륵사지 일대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자 백제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서동공원과 서동생태관광지, 왕궁리유적 등이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이어가볼 만하다.
무거워진 다리를 옮겨 다시 미륵사지석탑 앞에 서 본다. 탑의 으스러진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스며든다. 폐허였던 터 위로 다시 목탑이 그려지고 박물관에서 본 것처럼 동원, 중원, 서원 3개의 사찰 사이 회랑이 이어진다. 빈터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라는 미륵불의 또 다른 가르침처럼 느껴진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꿈을 발아래에 두고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마음에 미륵불 하나를 품은 듯 모두가 안녕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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