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정책주간지 K-공감
월급 봉투 쏟아 붓던 레고 덕후 전통문화에 새로움을 더하다
'전통문화를 레고 블록으로 재현하는 콜린 진 작가'

요즘 서울 종로구 종묘에 가면 색다른 볼거리가 있다.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은 그 볼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유독 붐빈다. 허리를 굽힌 관람객들은 유리관에 코를 박고 감탄사를 쏟아냈다.
“와~ 이게 레고로 만든 거라고요?”
“디테일이 완전 살아 있어요!”
화제의 작품은 레고 아티스트 콜린 진 작가(본명 소진호)의 ‘레고 오향 친제반차도’다. ‘오향 친제반차도’는 국왕이 종묘에서 제례를 치를 때 전체 참석자들의 자리 배치를 그린 대형 그림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궁중기록화 중 종묘제례악의 전체 현장을 조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콜린 진 작가는 이 그림을 레고 블록 2만 2000개로 재현해냈다.
‘오향 친제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제관, 문무 관료, 악대, 무용수, 종친 등 무려 209명이다. 악기도 26종이나 된다. 조선시대 국왕이 주관하는 종묘제례의 순간을 생생하게 살려낸 그는 “작품을 만드는 데 꼬박 4개월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등장인물 한 명을 만드는 데만 레고 블록 70~200개가 사용됐다. 시간여행 같은 레고 블록과 전통문화의 접선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콜린 진 작가는 어릴 적 장난감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신기한 장난감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또래들 사이에선 단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인싸(인사이더)’였다. 그런 그에게도 레고는 좀체 갖기 힘든 장난감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레고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레고를 로망으로 간직한 채 성장한 소년은 어른이 돼 월급의 절반을 레고에 쏟아붓는 ‘레고 덕후’가 됐고 결혼한 뒤엔 딸아이의 장난감을 레고 블록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레고 메이커’가 됐다.
레고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레고 아트는 전문 예술 분야는 아니지만 이를 직업적으로 하는 이들이 생길 만큼 세계적으로 마니아가 많다. 콜린 진 작가 말에 따르면 해외를 돌며 전시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레고사에서 정식으로 후원하며 육성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겼다. 그럼에도 전통문화만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이는 그가 유일하다. 그의 작품은 현재 주프랑스한국문화원에서 선보일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콜린 진 작가에겐 이제 ‘K-레고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이름표가 생겼다.
“이제 갈 길이 정해진 것 같아요(웃음). 취미로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레고를 통해 전통문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게 제 역할인 것 같아요.” 작은 블록은 그의 손안에서 또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까? 향대청에서 콜린 진 작가와 마주 앉았다.

서울 종로구 종묘 향대청에서 콜린 진 작가가 블록 2만 2000개로 만든 ‘레고 오향 친제반차도’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레고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라면서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블록 안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어릴 때부터 집안에 장난감이 무척 많았다고. 그중에서도 특히 레고를 좋아한 이유가 있나?
그때만 해도 레고는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만큼 귀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출장 갔다 하나라도 사다주면 친구들 사이에선 ‘인싸’가 됐다. 우리 집에 놀러오려는 아이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레고를 마음껏 갖고 놀진 못했다. 본격적으로 ‘덕질’을 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특히 ‘스타워즈’ 시리즈에 제대로 꽂혔다. 월급의 절반을 레고에 탕진할 정도였다.
소장한 레고가 얼마나 되나?
몇 년 전까지 장난감 박물관을 운영했는데 그곳에 한가득이었다. 지금까지 산 레고를 돈으로 환산하면 5000만~6000만 원은 되지 않을까 싶다.
레고로 전통문화를 재현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
레고로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딸아이가 태어나고서다. 아이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레고로 장난감과 학용품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연필깎이, 필통, 탁상용 램프 등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관상용 작품이 수백 개에 이른다. 아이가 크고 나니 더 이상 레고로 할 일이 없더라. 운영하던 장난감 박물관까지 코로나19로 문을 닫으면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때 아내가 레고로 전통문화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처음 만든 작품이 ‘승무’였다.

콜린 진의 레고 작품. 채구를 포구문에 넣으면 꽃송이를 받고 못 넣으면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고려시대 유희무 ‘포구락’(왼쪽)과 붓과 먹, 호롱불 등이 놓인 선비의 책상을 표현한 ‘선비 땅을 알다’. (사진, 콜린 진)



‘콜린진의 역사적인 레고’라는 제목으로 개인전까지 열었다.
주변에서 승무를 보고 취미로만 하기 아깝다며 전시회를 열어보라고 권했다. 처음엔 내가 무슨 전시냐며 사양했다. 아내가 도와줄 테니 한번 해보라고 한 게 일이 커져버렸다.
전시 반응은 어땠나?
사람들이 ‘뭐 이런 애들 장난감 같은 걸 전시하냐’며 비난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전시회 전날까지 한숨도 못 잤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좋은 반응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레고 자체에, 기성세대는 전통문화에 초점을 두고 남녀노소가 모두 전시를 즐기는 듯했다. 대부분의 전시회는 부모 손에 아이들이 이끌려오기 마련인데 내 전시에선 아이가 나서서 부모에게 설명하는 풍경이 흥미로웠다.
‘오향 친제반차도’는 쉽게 도전하기 힘든 대형 작품이다. 어떻게 만들게 됐나?
개인전 전시회장이 있던 곳 아래층에 국가유산청 궁릉유적본부 서울사무소가 있었다. 한 학예사가 전시 구경을 왔다가 종묘제례악을 재현한 작품을 보고 연락을 해왔다. 대부분 종묘를 새로 해석한다고 하면 건축물로서의 종묘를 만드는데 종묘제례악을 재현한 건 처음 봤다는 거다. 학예사는 ‘종묘의 근원은 종묘제례악’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도 종묘제례악이 전승됐기 때문에 종묘가 유지되고 있다고, 종묘제례악이 없었다면 지금의 종묘는 속 빈 건물로 남아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꼭 함께 뭔가를 해보자고 한 게 ‘레고 오향 친제반차도’로 이어졌다.
등장인물이 많아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국가유산청에서 지난 5월 종묘 향대청 특별 개방 시기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하면서 참고 자료들을 줬다. 등장인물이 209명이나 되는 데다 일관성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이 됐다. ‘오향 친제반차도’는 궁정 화가가 종묘제례악을 뒤에서 지켜보고 그린 그림이다. 관람객 시선에서 볼 때 등장인물이 모두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특히 왕과 왕세자를 직접 그리는 것은 당시 금기였기 때문에 다른 참고자료를 보고 상상해 만들어야 했다.
한국의 곡선미를 직선의 레고 블록으로 구현해낸 것도 무척 신기하다.
레고 아트 세계엔 암묵적인 몇 가지 금기사항이 있다. 블록을 자르거나 색을 입히면 안 되고 접착제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기존의 레고 블록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곡선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나는 블록을 느슨하게 결합해 블록 사이에 여유공간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는데 교량이나 다리의 아치형 구조를 만드는 방식이 한복 저고리 등 곡선을 표현하는 데 참고가 됐다.
전통문화를 재현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
‘종묘의궤’ 등 궁중 서적을 찾아보며 열심히 공부한다. 전통문화를 정확히 보여줘야 내 작품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기대하는 관람객도 있다. 약과 적이라는 두 가지 악기를 들고 추는 춤인 ‘문무’를 재현한 작품을 만들 때 표현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악기를 하나만 만들었는데 그걸 알아차리고 지적한 관람객이 있었다. 결국 다 수정했다. 1%의 틀릴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블록을 만진다. 누구보다 ‘역사 덕후’인 아내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서 항상 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 작가의 상상력을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레고 블록을 마음대로 변형하면 안 되기 때문에 원하는 모양이나 색깔이 없으면 상상력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가령 가야금 끝부분에 명주실로 현을 묶는 ‘염미’가 있는데 크루아상 모양의 레고 블록이 염미의 실타래 모양과 비슷해 그것을 활용했다. 아내와 크루아상 블록이 좋을지 과자 프레첼 모양의 블록이 좋을지 깊은 토론을 거쳤다(웃음). 장고 채는 해리포터 요술봉으로, 대금 채는 스타워즈 광선검으로 표현하는 등 자세히 보면 숨겨진 재미가 많다.
프랑스에서도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고.
10월 5일까지 ‘한국의 전통 놀이’를 주제로 주프랑스한국문화원에서 작품을 전시한다. 현지에서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신기하다’고 감탄하거나 ‘레고사의 완제품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 경우다. 오해한 관객들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깜짝 놀란다. 특히 특정 색상이나 곡선이 한국적이라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뿌듯했다.
레고 아트를 보면 거대한 작품이 많다. 주변에서는 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큰 건축물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결국 건물을 만드는 것도, 그 안에 이야기를 담는 것도 사람의 일이지 않나. 특히 전통문화와 관련된 작업을 계속해보려 한다. 전통문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명인들이 개인전에 와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책임감이 들었다. 한 판소리 고수는 레고로 만든 북을 보곤 30분 넘게 눈을 떼지 못하더라. 그간 궁중문화를 주로 표현했는데 앞으로는 남사당같이 민중과 친숙한 문화를 구현해보는 것도 구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흥미롭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어릴 때 레고 한번 안 가지고 논 사람 없을 거다. 그러니 내 작품도 친숙하게 느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전통문화를 새롭게 볼 기회를,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를 가장 한국적인 모습으로 블록 안에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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