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콩트>
숨은 그림
'글. 박순철'

“여기 계신 어머님들 건강하게 오래 사시려면, 잘 잡숫고 마음 편안하게 생활 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절대 마음 상하시지 말고, 자식들 찾아오지 않는다고 고깝게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에 담아두면 병이 됩니다. 그러면 더 좋은 세상 못 보시고 우리 부모님처럼 저 세상으로 가시게 됩니다.”
“맞아!”
조용하던 장내가 조금씩 술렁거린다. 가사장삼을 걸친 중년 사내의 언변이 참으로 구수하다. 그 말에 매료되어 동조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간다.
“자식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젊은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옛날 어머님들 때보다 백배는 더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들이 싸구려 담배 피우실 때 우리 아들들은 값비싼 담배를 피우고 양주를 마시며 생활합니다. 그만큼 살기가 좋아졌는데 어머님들 오래 사셔야지요.”
“우리도 잘 먹고 건강해야 혀. 그래야 우리 손자 손녀 성공하는 것 보고 죽지.”
이번에도 맞장구치는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어머님들 건강하게 오래 잘 사시라고 특별히 여긴 오신 어머님들께만 식욕 당기는 식품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이건 비밀이니까 절대 여기서 받으셨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그럼, 돈 받는 것 아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돈? 절대로 안 받습니다. 정말 모두 제 어머님 같이 느껴져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나눠드린 것을 받았다는 확인은 해주셔야합니다. 이 제품은 워낙 고가여서 제 돈으로는 사드리지 못하고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산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금 전 어깨를 주물러주고 음료수를 가져다주던 여인이 양주병 크기 정도의 약병이 담긴 쇼핑백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그 뒤를 따라 덩치 큰 사내가 ‘확인서’라는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확인을 받는다.
“어머님! 여기 성함 쓰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사인이 뭐여? 나는 그런 것 몰러.”
한 노인이 사내가 내민 펜과 종이를 들고 주춤거리자 김 부장이라는 여인이 다가온다.
“어머님! 그 사인이라는 것 어렵지 않아요. 그냥 성함 쓰시면 돼요.”
김 부장의 설명대로 노인들은 그가 가리키는 곳에 이름 석 자를 삐뚤삐뚤하게 써서 내민다. 노인들은 식품상자를 받아들고 좋아라하며 앞 다퉈 건물을 빠져나갔다.

“서갑식 과장님 되시죠? 백세건강식품 대리 이영찬입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00도청 웰빙산업과 서 과장 앞에서 명함과 서류를 내민다.
“무슨 일이신지요?”
“네,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서 건강식품을 구매하시고 대금을 내지 않으세요. 그래서 들렀습니다.”
어리둥절해하며 사내와 서류를 번갈아 살피던 서 과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저 갑식입니다. 혹시 무슨 건강식품이라고 하는 것 구입하고 돈 안주신 적 있으세요?”
핸드폰으로 얼마간 통화를 마친 서 과장이 사내를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뭘 잘못알고 오신 것 같네요. 우리 어머니는 그런 물건 구입하신 적 없다고 하시는데요.”
“여기 분명히 어머님 사인되어 있잖아요. 왜 우리가 익은 밥 먹고 설된 소리하겠어요?”
“이 사인이 우리 어머니 사인이란 말입니까?”
“네. 그렇다니까요.”
“우리 어머니는 겨우 한글을 아시는 분입니다. 지금껏 어머니가 사인하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어요.”
“물론 그러시겠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여기 사본을 정 못 믿겠으면 내일 원본을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추가 비용은 감수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내의 엄포성 발언에 다시 서 과장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한 끝에 볼멘소리를 토해낸다.
“공짜로 준다고 해서 이름을 쓰셨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아니, 흙 파가지고 장사하는 사람 봤습니까?”
일이 이쯤 되자 서 과장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눈치다. 아무래도 시골에 계신 어머님이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나 싶어서이다.
서 과장은 사내가 내민 계약서를 찬찬히 살핀다. 물품대금이 백 오십 만원이나 된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한들 그렇게 비싼 물건을 덜컹 사실 분이 아니라는 믿음은 가지만 앞에 놓인 계약서에는 분명 어머니의 이름이 삐뚤삐뚤 기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내민 서류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 거짓말 한번 안하고 사신 우리 어머님의 말을 나는 더 믿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일 다시 이야기 합시다. 지금 급한 회의가 있어서 국장실에 올라가봐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위기를 피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서 과장이 수첩과 볼펜을 챙겨들고 일어서자 사내가 엉거주춤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꾸 그러시면 승진하는데 지장 있을 것인데….”
사내를 따돌리고 돌아온 서 과장이 유 팀장을 불렀다.
“유 팀장, 아무래도 우리 어머님이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식품 위생과에 좀 알아봐줘. 이 계약서에 적힌 약이 어떤 성분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격은 얼마나 가는지.”
“네.”
유 팀장은 근 30여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과장님 말씀대로 사기를 당하신 것 맞습니다. 식품 위생과에도 비슷한 사건이 접수되었고, 또 조금 전 청풍일보에 근무하는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그런 유사한 사기 행위가 벌어지고 있어서 심층취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네. 그들의 수법은 참으로 놀라워서 겉으로는 아무런 하자도 나타나지 않고, 더구나 그 제품은 식품으로 신고 되어있어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아주 지능적이구먼?”
“처음에는 노인들을 위한답시고 안마도 해드리고 값싼 물건도 나누어 주고 하다가 식욕 당기는 약이라고 하며 나누어 드리고는 정부 보조용품이어서 받았다는 확인을 받아야 한다며 서명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서명?”
“네. 그런데 그 계약서 용지에 비밀이 숨어있었어요.”
“무슨?”
“다른 분들도 그 종이에 이름과 서명을 쓰는 난만 있었지, 계약서라는 문구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현재의‘스테가노 그래피’기법처럼, 옛날에도 오줌이나 우유로 종이에 글을 쓴 뒤 그 종이를 불에 쪼이면 글씨가 드러나게 하는 밀서를 보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방법으로 노인들을 속인 것 같다고 하는데 조사가 마무리돼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 과장은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 생각에 먹먹해오는 가슴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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