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미역국
'글. 박종희'

무슨 장한 일을 했다고 여름 감기에 걸렸다. 며칠 누워있으니 딸애가 미역국을 끓였다. 따로 일러주지 않았는데 친정어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뚝배기에 미역국을 끓여 온 딸애가 대견했다. 딸은 어머니의 모습을 복사하며 성장한다더니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딸애가 끓여온 미역국을 앞에 놓고 눈물을 찍어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내 일상도 삐거덕거렸다. 세상에서 어머니 한 분이 없어졌는데 온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음식을 할 때도 어머니가 아른거렸다. 늘 내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시던 어머니였기에 한동안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누르곤 했다.



딸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였다. 6월 하짓날이라 더위가 한창 시작될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산모가 찬 바람을 쐬면 안 된다고 발가락도 안 보이게 온몸을 싸매주었다. 딸애와 내가 있는 안방은 바람 한 점도 못 들어오게 해놓고 수시로 미역국을 끓였다. 산모가 미역국을 잘 먹어야 회복이 빠르다며 아버지가 어머니 산바라지해 주실 때 했던 것처럼 세 시간에 한 번씩 미역국을 들였다.
우동그릇만큼이나 큰 뚝배기에 기름이 좔좔 흐르는 미역국에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유난스럽게 긴 입덧으로 지쳐있던 나는 오래 달여 부들부들한 미역국을 다른 반찬 없이도 술술 잘 넘겼다.
첫 손주를 보게 되는 어머니는 출산예정일에 맞추어 해산미역도 사 오고 참기름도 직접 짜두셨다. 유별나게 해산미역까지 사 왔느냐고 하는 내게 산모는 바닷바람으로 말린 산모용 미역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은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는 바다를 품은 천일염을 볶아 간을 했다. 천일염을 잘 볶아 간수를 날린 소금으로 간을 맞춘 어머니의 미역국은 뒷맛이 달고 깔끔했다.
어머니가 소금으로 미역국 간을 맞추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자식을 낳은 어머니는 미역을 그리워하는 바다의 마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 바다가 살점들을 떠나보내고 흘린 눈물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으니까.
미역도 처음부터 단단한 것은 아니었다. 갓난아이처럼 바다가 키워주는 대로 소금물을 먹고 살던 미역은 유순하고 어린 미역 나무였다. 수십번의 성장통을 겪어야 어른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젖은 미역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오래 두고 먹어도 상하지 않도록 미역의 물기를 거두었다. 바다의 비린 습성과 소금기를 없애려 바람과 햇빛에 번갈아 가며 미역을 말렸다. 거센 비바람과 햇빛을 견딘 미역은 마침내 바다가 아닌 곳에서도 살 수 있을 만큼 억세고 단단해졌다.
어머니의 가슴도 처음부터 단단했던 것은 아니다. 박꽃처럼 순하고 곱던 어머니는 육 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지키느라 어머니의 가슴에는 덕지덕지 더께가 앉았다. 시나브로 어머니도 마른미역처럼 억척스럽고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산모한테 미역국을 먹이는 이유를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되었으니 세상을 쉽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미역처럼 단단해져야 자식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오래된 관절염이 도지듯 통증이 느껴진다. 맏딸이었지만,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신날에도 어머니가 음식 장만을 해놓으면 가서 얌체처럼 먹기만 했다. 어머니께 미역국 한 그릇 끓여드리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생신상 한 번 못 차려 드린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이야.
몸이 아플 때나 어머니가 그리워지면 습관처럼 미역국을 끓인다. 미역국에서 비릿한 바다 냄새가 올라오고 그 냄새를 맡으면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벼랑 끝에 서면 바다를 찾는 것처럼 미역국도 나한테는 어머니의 품만 같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미역국을 먹고 땀을 푹 내면 마치 어머니가 만져주듯 몸살이 거뜬히 낫는다.
평소 국을 좋아하지 않는 딸애도 신기하게 미역국은 잘 먹는다. 후루룩후루룩 잘 넘어가는 미역국이 딸애한테는 어떤 의미일까. 미역이 바다를 그리워하듯 딸애도 미역국을 먹으며 나를 생각할까. 뜨겁게 먹고 얼른 감기를 떼어버리라고 끓여온 미역국을 두고 눈물 바람을 하는 내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라고 딸애는 다시 숟가락을 쥐여 준다. 아픈 엄마를 챙기는 기특한 딸애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깨작거리지 말고 푹푹 좀 떠먹어라! 감기에는 미역국만 한 게 없다.” 뒤통수에서 마치 귀에 익은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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