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가까이에서 본 국가유산
경복궁은 누가 만들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유산 경복궁'

경복궁은 한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유산이다. 그런데 그 경복궁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질문의 답으로 가장 자주 나올 이야기는 "흥선대원군이 만들었다"는 말일 듯싶다. 가끔 조선의 왕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만들었다"는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 전경



19세기 조선은 과학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경복궁이 처음 건설될 당시 궁궐 건설을 지시한 책임자는 분명 조선의 임금이었던 이성계였을 것이고, 그 경복궁이 1592년 불 타 없어진 뒤 세월이 흘러 다시 짓는 사업에 비용을 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라면 역시 흥선대원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복궁이라는 건물을 실제로 짓는, 실제 건물 구조를 하나하나 설계한 인물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큰 건물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순서로 작업을 해야 하는지, 어떤 재료를 이용해서 어떻게 조립해야 무거운 무게를 버텨 내며 튼튼하게 서 있는 건물이 되는지, 자신이 가진 기술 지식을 총동원해서 건물을 짓는 작업을 직접 진행해 나갔을 것이다.
과학기술을 맡아 일한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던 옛 조선의 문화는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또 다른 방향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 어떻게 보면 정반대 방향의 충격이다. 강력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산업을 발전시켜 국력을 키운 강대국의 침략 앞에 조선의 과학이 부족함을 절감한 것이다.

02. 경복궁 근정전 내부 가구 03. 경복궁 근정전 현판



그 당시 과학지식이 계승되었더라면?
결국 조선이 망하고 한국인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동안 유럽 과학기술을 서서히 배워 나갔다. 이런 역사를 경험하다 보면, 20세기 초 사람들은 과학이라면 어쩐지 다른 나라가 잘하고 조선은 못하는 것, 외국에서 들어 온 것, 일본과 같은 침략자와 함께 때를 맞춰 들어 온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듯싶다. 그런 생각이 자꾸 퍼지니까, 나중에는 과학은 외국 문화와 가깝고 심지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과학기술은 반대되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자리 잡은 듯하다. 지금까지도 이곳저곳에서 가끔 이런 생각의 남은 흔적이 간혹 내비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경복궁에 비가 내릴 때 근정전 앞 넓은 공터 바닥의 박석 사이로 빗물이 흘러 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운치가 있는 풍경이라고 이야기한다. 근정전 앞의 박석 마당은 물빠짐이 뛰어난 특징이 있어서 어지간히 비가 와도 물 웅덩이가 생겨 고이는 현상이 잘 발생하지 않는다. 이 모습을 두고 “현대 과학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운 지혜를 우리 선조들은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까지는 재미난 이야깃거리며 국가유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평가를 조선의 정신문화가 현대 과학과 상반되며, 그래서 우월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좀 이상한 생각이다. 근정전 앞의 박석 마당에 현대식 배수 시설이 없다고 해서, 설마 조선시대 기술자들이 무슨 마법을 이용해서 물 빠짐이 잘되게 한 것일까? 조선시대 기술자들은 현대식 배수 시설과 다른 재료를 활용하고 다른 원리를 이용해서 바닥을 만드는 그들 나름의 과학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이성계나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비해서 박석 마당을 만들 때 어떤 자재로 어떻게 공사를 해서 물 빠짐을 잘되게 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부족했기에 그 지식과 기록이 무시당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과학이 잊혀 지금까지 계승되지 않았을 뿐이다.
즉, 경복궁 박석 마당의 물빠짐은 선조들의 문화가 과학이 아니었지만 신비롭게도 우월했다는 증거가 절대 아니다. 그게 아니라 흥선대원군이 운현궁 안방에 앉아 경복궁을 짓는 게 좋겠다고 명령하면 실제로 돌을 들고 땀을 흘리면서 바닥 공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과학기술이 발달해 있었다는 증거다.

04. 고려사 김사행 (ⓒ국역 고려사열전)



과학, 지식이 퍼져 나가고 꾸준히 진행된 한국사의 중요한 한 측면
과학기술의 눈으로 국가유산을 살펴보는 일은 문화를 음미하는 또 다른 한 방법이다. 그 유산이 탄생한 시대의 임금, 영웅, 높은 사람,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상의 더욱 상세한 이야기를 과학기술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은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지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흙과 유약, 아름다운 옷감을 물들일 때 사용하는 염료, 전쟁터에서 사용한 화약은 화학의 산물이다. 넓은 들판에서 어떻게 해야 여러 가지 곡식을 잘 자라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생물학 지식이다. 그런 지식이 개발되어 퍼져 나가고 세상 사람들의 삶을 바꿔 간 과정은 지난 역사 시대 꾸준히 진행되어 온 한국사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그 때문에 과학기술 발전이 우리 문화에서 예로부터 중요했으며, 그 변화와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과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기술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국가유산 속에 스며 있는 과학기술에 관심을 두는 것은 과학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 또는 비과학적인 것이 오히려 우리의 전통이라는 위험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05. 교태전 아미산굴뚝 06. 자경전 십장생굴뚝과 담장



1393년 줄 긋는 도구로 땅의 모양과 방향을 측정한 기록
그렇다면 과연 진짜 경복궁을 만든 인물은 누구일까?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빠뜨리면 아쉬울 만한 사람이 ‘김사행’이다.
김사행은 고려 말 사람으로 초년에는 비참한 신세로 몽골제국 원나라에 보내져 살았던 인물이다. 곡절 끝에 고려에 돌아온 후 그는 노국공주를 추모하기 위한 건물 공사를 맡게 되었다. 《고려사》 등 조선시대에 나온 역사 기록을 보면 김사행은 교묘한 사람이며 임금에게 아부를 잘하는 바르지 못한 인물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가 노국공주를 잃고 슬퍼하는 공민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단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물을 지으라면서 부추긴 간신배라는 지적도 있다.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새 임금이 들어서자 김사행은 전 왕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노비가 되어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김사행은 다시 땅을 측량하는 작업을 했고, 팔각전을 비롯한 각종 궁궐 건물을 건설하는 업무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런 사실을 보면 그는 대형 건물 건축에 필요한 기술적 지식과 예술적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화려한 건물이 필요할 때면 항상 그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실력자였을 개연성이 높다.

07. 경복궁 근정전 야경



《조선왕조실록》 1393년 음력 2월 10일 기록에는 그가 직접 줄 긋는 도구를 들고 땅의 모양과 방향을 측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 아마도 경복궁 건설의 실제 작업에서 그가 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자 그는 공적을 더욱 인정받아 겸판사헌부사, 수충보리공신이라는 높은 관직으로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08. 경복궁 전경



그런 그의 최후는 어땠을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김사행은 반란을 일으킨 이방원의 편이 아니라는 취급을 받아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명예롭지 못한 인물이 된 탓에 김사행의 건축 분야 과학 지식과 기술에 관한 기록은 더욱더 찾기 어려워졌다. 아마도 과거에 그 자신이 만들었을 조선의 삼군부 건물에 처형된 그의 목이 걸렸다는 것이 그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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