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옹기종기 옥산 마을길 따라
향기로운 귀거래의 꿈자리
'옥산 국사봉 / 충현사와 강감찬 무덤'

지나간 날들은 혹독했고 쓸쓸했으며 위대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옥산玉山에 든 내 천년 잠, 깨우지 마라. 향기로운 귀거래의 꿈자리가 여기이니 _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빌려옴
키 작은 국사봉의 수수께끼 _ 옥산 국사봉
무엇 때문일까. 해발 171m의 낮은 산이라면 이름 없는 야산이기 쉬우련만 굳이 ‘국사봉’이라는 묵직한 이름을 얹은 까닭은. 아마도 전국의 수많은 국사봉 중 영흥도 국사봉國思峰(123m)을 빼고는 가장 낮은 산이리라. 그나마 영흥도는 고려말의 왕자 익령군이 은둔했던 섬으로, 국사봉은 그 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옥산의 키 작은 국사봉은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을 얻게 됐을까.
청주에는 세 곳의 국사봉이 있다.
낭성의 국사봉國師峰(586m), 남일의 국사봉國師峰(282m), 그리고 옥산의 국사봉國仕峰(171m)이다. 앞의 두 곳은 ‘스승 사師’자를 쓰는 국사봉으로, 그 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지혜로운 인물이 났다 하여 붙인 것이다. ‘선비 사士’자 국사봉과도 통한다. 다음으로 많이 쓰는 것은 ‘역사 사史’자의 국사봉으로 주로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던 곳들이다. 옥산 국사봉은 이와 달리 ‘벼슬 사仕’자를 쓴다. 큰 벼슬을 한 인물과 연관됐다는 것인데, 과연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야산에 불과한 낮은 봉우리에 국사봉의 이름을 얻게 한 큰 벼슬의 인물. 그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를 여는 일이다. 키 작은 국사봉이 품은 수수께끼는 결코 작지 않으니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어찌 설레지 않으랴.
<국사봉 산행> 국사리 앞 도로 건너에 보이는 산이나 국사리 쪽에서는 입구를 찾기 어렵다. 반대편 성덕사에서 출발하면 오솔길로 30분 정도의 짧은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꽃향유 군락이 만발하는데, 꽃향유는 ‘가을향기’,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졌다. 옛날 도박에 빠져서 죽은 충청도 남자가 죽어서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국사봉 성덕사와 국사봉

위대하고 찬란하신 영웅이 낙향한 곳은 _ 강감찬 미스터리
지나간 날들은 위대했다. 하지만 동시에 혹독했고 쓸쓸했다. 이제 그에겐 돌아가 몸과 마음을 뉘일 안식처가 절실했으니, 10만 대군의 외적을 물리치고 돌아온 백발의 영웅은 왕에게 낙향을 청했다. 왕은 옷소매를 잡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해에 다시 물러나길 간청하니 왕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고려가 낳은 불멸의 영웅 강감찬(948~1031)의 이야기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인 강감찬. 그런데 거란에 맞서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었던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이미 일흔둘의 노년이었다. 백발과 흰 수염으로 전장을 누빈 그에게 자연과 벗하는 안식만큼 강렬한 보상이 있었을까. 강감찬은 귀거래歸去來를 꿈꾸었다. 헌데 그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선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벼슬을 그만두고 성남별장으로 돌아갔다’는 짧은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의 경기도 성남지역 어디에도 강감찬의 유적은 찾을 수 없다. 태어난 곳은 서울의 낙성대라고 알려졌으나 이 불멸의 영웅이 돌아가 누운 무덤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강감찬이 83세에 문하시중의 벼슬로 재등장하기까지 약 10년 동안이나 관직을 떠나 낙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찬란하신 영웅은 대체 어디에 머물렀던 것일까.
충현사

대장군의 무덤이 발견되다 _ 충현사와 강감찬 무덤
사실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왔다. 동네 산자락에 유명한 대장군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마을의 이름은 ‘나라의 큰 벼슬을 한 인물이 났다’는 뜻의 국사리國仕里였고, 마을 앞엔 국사봉國仕峰이 있었다. 국사리의 노인들은 1950년대만 해도 나무하러 가면서 ‘강감찬장군 뫼(무덤) 있는 데로 가자’는 말들을 했노라고, 놀라운 이야기를 추억처럼 털어놨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옥산에 와서 처음듣게 된 후손의 심정은 어땠을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 실전된 줄로만 알았던 강감찬 장군의 무덤이라니. 그냥 전해지는 옛이야기라 하더라도 후손들은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때 아닌 무덤 찾기가 시작됐다. 소문은 밖으로도 퍼져서 당시 문교부에서도 현장을 확인하고자 했고, 분묘발굴비용도 지원했다. 마침내 1963년 김성균 국사편찬위원장의 지휘로 일대를 샅샅이 뒤져 ‘姜邯贊’이라 쓰인 묘지석을 발견하니, 국사리 마을의 최대 경사였다.
충현사 입구와 묘지 옆 석양,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강감찬 장군 묘

1964년엔 무덤을 새로 꾸미고, 1967년엔 추도비를 세웠다. 추도비의 제막이 있던 날, 강감찬 장군의 무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시골마을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69년엔 무덤 앞에 사당인 충현사를 세웠다. 이후 아늑하고 양지바른 강감찬 사당은 옥산초등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가 되었다. 강감찬은 죽기 전 고려의 최고벼슬인 문하시중을 지냈으니, 국사봉國仕峰이란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던 셈이다. 더구나 왜소한 체구였다고 기록된 강감찬의 외모처럼 옥산 국사봉 또한 겉보기에 평범하고 위압감이 없는 야산의 모습이니, 이 또한 절묘하지 않은가.
그런데 또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강감찬의 무덤은 왜 하필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오가지만 가장 그럴 듯한 것은 그의 식읍지가 이곳이었다는 추측이다. 귀주대첩 이후, 강감찬이 두 차례에 걸쳐 하사받은 식읍이 ‘천수현天水縣 3백호’와 ‘천수군天水郡 1천호’였는데, 국사봉의 서쪽 들판을 휘적시며 흐르는 물길이 바로 천수천天水川이니 이일대가 감강찬의 식읍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무덤은 말이 없고 전설만 살아서 천년을 건너왔다.
<몽단이고개 의마총>오산리를 벗어나 병천 오창 방면 이정표를 따라 3분쯤 달리면 경부고속도로 지하도가 나온다. 그 지하도를 통과하면 바로 의마총 비석과 무덤이 보인다. 말이 네 다리를 뻗고 누운모양이 선명하다. 의마총 위 산자락엔 박동명 장군의 무덤이 있으며, 이곳에서 혼령의 응답이 끊기고, 아들이 꿈에서 깨어났다고 해 몽단이고개, 혹은 장군의 애마가 발굽이 땅에 붙은 듯 걸음을 떼지 않았다 해서 접지接趾골이라고도 부른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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