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K-유산속으로
모란이 피기까지 수백 번의 붓칠을 더하다
'삶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민화 체험 공방'

세상을 둘러싼 색이 더욱 짙어지는 여름이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민화(民畵) 체험 공방 안에서도 흰 바탕 위에 색을 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예술에 대한 갈증 속에 풍염(豊艶)한 모란 두 송이 피워낸 과정을 따라가 봤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최미란, 김영민, 김은영, 정송희 참가자



어느 날 민화가 내게로 왔다
민화는 조선시대부터 서민의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다. 사이좋은 한 쌍의 새와 꽃을 그린 화조도(花鳥圖)는 신방 또는 안방에 놓였고, 장수(長壽)의 상징을 그린 십장생도(十長生圖)는 회갑 잔치에 병풍으로 놓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민화 안에 자신의 소망과 예술혼을 담는다.
오늘 네 명의 참가자도 “민화 그리기에 도전해 보고 싶다”라는 공통의 소망을 품고 공방을 찾아왔다. 미술 전문 출판사가 운영하는 공간 ‘그림그리기좋은날’에서는 평소 미술 작품 전시와 체험, 강연 등이 이루어진다. 본격적인 체험에 앞서 민화작가이자 교육가인 최영진 작가가 민화에 관해 설명한다.

01. 최영진 작가가 민화에 관한 설명한다. 02. 김은영 참가자가 색칠하는 모습



“민화는 정물화일 수도, 풍경화일 수도, 상상화일 수도 있습니다. 소재의 제약이 없죠. 오늘날에는 책가도(冊架圖) 중간에 커피 전문점의 머그잔이나 명품 가방을 그려 넣는 등 개인의 취향을 더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화풍을 빌려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죠. 다만 오늘은 첫 도전인 만큼 민화의 대표적 소재 중 하나이자 화중왕(花中王)이며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상징하는 모란을 채색해 부채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밑그림이 그려진 부채와 전통 붓, 한국화 전용 물감 등이 네 명 앞에 놓인다. 이제 평면의 종이 위에 옅은 색에서 점점 진한 색으로, 또 점점 세밀하게 선과 색으로 입체감을 더할 차례다. “오래전 소셜미디어에서 민화를 그리는 짧은 영상을 본 적 있어요. 제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평소 관련 사진과 영상을 많이 찾아보거든요. 그래서 고양이 그리는 민화 작가의 모습이 알고리즘으로 추천된 것이죠. 그때부터 민화에 매료되어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쭉 해 왔어요.”
“오래도록 바라던 기회”라는 김은영 씨의 말에 영민 씨도 동의한다. 초등학교 체험학습 전문 교사인 김영민 씨는 창덕궁에 갔다가 책가도를 보고 민화에 빠졌다. 영민 씨가 “요즘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작품이 많지만, 저는 오방색을 사용한 민화 고유의 매력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진한 색을 사용하는데도 촌스럽지 않고 오래 두고 보고 싶은 원화만의 매력이 있어요”라고 말하자 최영진 작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 민화에 관심이 큰 것을 보니 오늘 작업이 수월하게 잘 진행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03,04. '바림'작업을 하는 참가자의 모습 05. 민화작품이 완성되면 낙관을 찍는다.



손끝으로 모란을 피워내는 과정 “실력자를 따로 뽑아 오신 건가요?”
채색이 시작되고, 막힘없이 작업을 이어 나가는 네 사람을 보고 최영진 작가가 감탄한다. 붓에 물감을 묻혀 칠하면 되는 간단한 일 같지만, 사실 녹록지 않다. 물을 많이 섞어 쓰면 종이가 울거나 색이 번지기 때문에 적절히 농도를 조절하며 색을 칠해야 한다. 전통 붓을 쓰는 것도 낯설다. 하지만 네 사람은 최영진 작가가 감탄할 만큼 힘과 농도를 잘 조절하며 색을 칠해나간다.
민화의 기법인 바림에 관해서도 배워 보았다. 바림이란 색을 칠할 때 채색 붓으로 한쪽을 진하게 칠하고 물 붓을 사용해 점점 옅고 흐리게 색을 퍼트려 입체감을 살리는 것을 말한다. 서양화의 그러데이션(Gradation)과 같다. 영민 씨가 “생각보다 바림 작업이 굉장히 어렵네요. 무엇이든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일이 더 힘들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돼요”라며 한숨을 쉰다. 그의 말처럼 꽃잎 하나하나, 잎 하나하나에 바림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기에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또 완급 조절을 잘해야 색이 지워지지 않고 고루 펴질 수 있다.
숲해설가로 평소 식물에 관심이 큰 최미란 씨에게 민화는 또 다른 숲이다. 평소 민화를 통해 과거에 어떤 식물이 있었고, 또 사람들이 관심을 두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에 애정이 큰 만큼 채색할 때도 여린 꽃잎을 애지중지 대하듯 정성을 다한다. 미란 씨의 붓이 닿을 때마다 모란에도 생기가 더해진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들면서도 또 힘이 난다.
평소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정송희 씨는 전공자답게 빠르면서도 꼼꼼하게 색을 칠한다. 정성스레 칠한 꽃송이가 마치 진주알처럼 반짝인다. 붉은색 계열로 꽃을 칠한 세 사람과 달리 송희 씨는 살구색과 하늘색을 선택해 개성 강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최영진 작가가 “내 손끝에서 꽃이 피어나다니, 마치 창조주가 된 기분이죠?”라고 묻자, 송희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06. 참가자들이 완성한 민화부채



삶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민화
한 고개 넘어 다시 새 고개다. 잎과 줄기를 칠하고 나면 꽃송이를 칠해야 하고, 꽃잎과 이파리 하나하나 바림으로 생기를 더하고 나면 다음은 잎맥을 그려 넣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또 꽃잎 하나하나 경계선을 그려 넣는다. 꽃 한 송이 피워내는 데 한 계절만 필요한 게 아니듯 그림 속 꽃을 피워내는 데도 보통 정성이 필요한것이 아니다. 최영진 작가가 “고지가 눈앞이다”라며 참가자들을 독려한다. 아울러 “짧은 시간 안에 훌륭하게 해 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잎맥을 그리는 일은 전문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거든요”라고 추켜세운다.
“이렇게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줄 몰랐어요. 아까워서 부채로 못 쓰겠는데요?” 미란 씨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웃는다. 시원한 바람을 보내 달라며 만든 부채인데, 만들고 보니 되레 바람에 날아갈까 걱정일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물론 오늘 함께한 시간도 소중하다.
“평소 민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초충도(草蟲圖)를 가르쳐준 적도 있고요. 하지만 관심이 큰 동시에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 갈증이 일었습니다. 오늘 작가님께 민화에 관해 듣고, 직접 체험해 본 덕분에 앞으로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아이들의 집중력을 길러주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앞으로 아이들과 수업 시간에 민화를 그려볼 계획이에요.”
송희 씨의 말에 은영 씨도 “앞으로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도 더 깊이 있게 보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을 보탠다. 오늘 네 사람이 피워낸 것이 비단 모란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민화에 대한 관심도 꽃송이처럼 탐스럽게 피어났다.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듯 앞으로 민화가 이들의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길 바란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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