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2-2.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우리나라에 『직지』가 알려지면서 청주의 학계에서도 크게 주목하였다. 『직지』를 인쇄한 곳이 청주 흥덕사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그 흥덕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와 고문헌에서 흥덕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중략) 1985년 10월 8일에 아주 극적으로 흥덕사지가 확인되었다. 운천동의 한 절터를 발굴하던 중에 ‘흥덕사(興德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구가 발견된 것이다. 이 절터의 발굴부터 금구의 발견까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우연의 연속이었고 경이적이었다. 1984년에 청주시 운천동에서 택지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무심천변의 절터(현 CCC아카데미센터 북측)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맡게 되었다. 발굴은 11월 말에 시작되었는데 그해는 겨울이 좀 일찍 찾아와 11월인데도 날씨가 쌀쌀하고 진눈깨비도 자주 내려서 어려움을 겪으며 발굴조사를 하던 11월 29일 늦은 오후였다. 발굴현장에 창고 겸 사무실로 쳐놓은 비닐 천막에 한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다.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서 현장 일을 맡고 있던 나는 그 노인에게 찾아오신 이유를 물으니 머뭇거리다 담배쌈지에서 신문지로 꼬깃꼬깃 싸맨 동전 두 닢을 꺼내놓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노라고 하였다. 노인의 이름은 김정구, 연세는 76세였다. 당시 원로가수의 이름과 똑같아서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김정구 할아버지가 내놓은 동전은 조선 시대에 흔하게 사용되었던 상평통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만든 당백전(當百錢)이었다. 친절하게 설명해 드렸지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구부정한 몸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되돌아가셨다. 박물관에서 나와 발굴조사를 한다고 하니 용돈이나 될까 싶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동전을 팔아볼 심산으로 가져오신 눈치였다.

김정구 노인댁에서 발견된 석탑 부재(안상석)



김정구 할아버지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발굴 작업을 마무리하려던 참에 그 할아버지가 다시 찾아와서는 집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돌이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연꽃무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확인해 보고 싶다며 노인을 따라 나도 자전거를 타고 사직동 변전소 근처의 그 댁으로 달려갔다. 근대식 한옥으로 지어진 집의 툇마루 앞에 놓인 댓돌을 살펴보니 안상(眼象)이 새겨진 고려 석탑의 한 부재였다. 출처를 물으니 예전 살던 집에 있던 것인데 이사를 오면서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다고 하셨다. 잔뜩 기대에 차서 호기심을 안고 할아버지의 옛집을 찾아가니 그곳이 하봉 마을 지금의 흥덕초등학교 부지였다. 마을 주변에는 많은 기와 파편이 널려 있었고 뒤편 구릉지 밭에도 와당과 함께 건물 초석들이 보였다. 틀림없는 옛 절터인데 이미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되어 마을은 다 철거되고 주변에 중장비가 들어와 파헤치고 있었다. 1984년 11월 29일 늦은 오후의 일이다.
우선 충북도청 문화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절터를 찾았는데 택지공사로 인해 곧 없어질 위험에 처해 있으니 긴급히 조치하여 주길 요청하였다. 전화 통화 중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왜 쓸데없이 공사를 방해하느냐는 것이었다. 요즘 공직자들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글로 표현하기도 힘든 욕설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우겨서 공문으로 접수하면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즉시 공문으로 접수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중지하고 현지를 보존한 후 이듬해인 1985년 7월에 발굴을 시작하였다.

흥덕사지 발굴 흥덕사지 발견 당시의 모습(1984.11.29.)전경



여기서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다. 이 절터를 처음 발견하고 도청에 신고할 때는 절터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였다. 충청북도에 절터 보존을 전화로 요청하고 다시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사진과 평판측량을 첨부한 공문으로 만들어 제출한 이후 행정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시행사인 한국토지개발공사 충북지사에 공문이 시달되고 다시 시공업체인 ㈜임광토건과 하청업체에 공문이 전해지는 과정에 한 달 정도가 소요되면서 택지공사가 그대로 진행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절터가 절반 가까이 훼손된 상태에서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절터 중심부에 있었던 개인 묘소의 이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묘소와 그 안쪽은 원형이 살아남았다. 묘소의 주인은 운천동에 세거해온 문화유씨의 조상이었다. 발굴을 해보니 절터는 이미 대각선으로 길게 3분의 1쯤 잘려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정확히 금당의 중심 즉 불상이 안치되었던 자리에 땅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불상이 앉았던 자리와 시신이 누워있던 장소가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후에 지도위원으로 발굴현장을 찾은 이화여자대학교 진홍섭 교수는 ‘산 자가 훼손하는 유적을 죽은 자가 지켰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발굴 종료와 함께 택지개발로 이어질 예정이던 절터는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로 확인되면서 사라질 운명이 뒤바뀌는 대반전을 이룬다. 발굴이 거의 마무리되던 1985년 10월 8일 ‘흥덕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 금구를 수습하였는데 이 또한 우연치고는 너무나 극적이었다. 그날은 마침 전날부터 내리는 비로 작업이 중단되고 나 혼자서 발굴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비는 10시쯤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무료함을 달래기도 할 겸 발굴현장 주변을 돌며 유물을 수습하다가 청동 금구 1점을 발견하였다. 택지공사장에 중장비가 오가면서 파인 구덩이에 고인 황톳물에 금구를 씻고 보니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一坐)’라고 음각된 글씨가 선명하였다. 갑인년 5월에 서원부 흥덕사에서 금구 1개를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는 당연히 ‘흥덕사’ 세 글자였다. 이 절터가 흥덕사 터임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절 이름을 알 수 없어 마을 이름에 따라 ‘연당리사지’로 가칭하여 발굴하고 있던 절터가 곧 『직지』를 인쇄한 바로 고려 흥덕사의 옛터로 밝혀진 것이다. 그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3부에서 계속>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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