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3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2-3.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발굴이 거의 마무리되던 1985년 10월 8일 ‘흥덕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 금구를 수습하였는데 이 또한 우연치고는 너무나 극적이었다. 그날은 마침 전날부터 내리는 비로 작업이 중단되고 나 혼자서 발굴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비는 10시쯤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무료함을 달래기도 할 겸 발굴현장 주변을 돌며 유물을 수습하다가 청동 금구 1점을 발견하였다. 택지공사장에 중장비가 오가면서 파인 구덩이에 고인 황톳물에 금구를 씻고 보니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一坐)’라고 음각된 글씨가 선명하였다. 갑인년 5월에 서원부 흥덕사에서 금구 1개를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는 당연히 ‘흥덕사’ 세 글자였다. 이 절터가 흥덕사 터임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절 이름을 알 수 없어 마을 이름에 따라 ‘연당리사지’로 가칭하여 발굴하고 있던 절터가 곧 『직지』를 인쇄한 바로 고려 흥덕사의 옛터로 밝혀진 것이다. 그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직동 변전소 근처의 공중전화로 달려가 당시 발굴조사 단장이신 김영진 교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김 교수님은 알았다며 내일 아침에 학교로 가겠으니 금구는 학교 박물관에 가져가 보관하고 외부에는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충북도청 문화재 당국과 협의 후 보도자료를 만들어 10월 10일에 현장에 모여든 기자들에게 이곳이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의 옛터로 밝혀졌음을 공개하니 언론에서는 금구와 흥덕사지 발굴 사진을 앞세워 대서특필하였고, 그날 저녁 9시 뉴스에도 톱뉴스로 보도되었다. 군부독재 시절 전두환 대통령 뉴스가 초반 15분을 차지하던 시절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 발굴 소식이 9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먼저 뉴스를 탔다.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민족문화에 관심을 잠시나마 돌릴 수 있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흥덕사지를 긴급히 국가사적으로 가지정하였다. 가지정 제도는 중요한 문화재가 발견되어 긴급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을 때 임지로 지정하는 제도인데, 이 법이 1962년에 생긴 이후 처음으로 흥덕사지에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 흥덕사지의 문화재 지정 안건이 통과되어 사적 제315호로 정식 지정되었다. 청주시장을 역임한 한범덕 시장이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이와 관련된 업무를 보았다는 후일담을 들었는데, 고향의 일이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처리하였다고 한다.
역사 도시라 자부하는 청주이지만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유적들이 대부분 없어진 탓에 지역에서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차에 흥덕사지 발굴은 청주의 문화적 자긍심을 한껏 고조시킨 일대 사건이 되었다. 흥덕사지 발굴 소식을 제일 먼저 호외로 알린 충청일보 임병무 기자는 그해 기자상을 받고 부상으로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기를 두드려 작성한 보도자료에 향후 대책으로 제시하였던 대로 흥덕사지의 보존정비와 고인쇄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고, 청주의 으뜸가는 문화자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청동그릇에 새겨진 흥덕사 글씨



흥덕사지 발굴 뒷이야기를 하자니 내 두 눈이 빠질 뻔했던 일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흥덕사지 발굴을 끝내고 박물관으로 돌아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유물을 실측하던 중에 ‘흥덕사’ 글씨가 새겨진 또 하나의 유물을 찾아낸 것이다. 보고서에 청동 불발(佛鉢)이라고 명칭을 붙여 소개한 큰 바가지처럼 생긴 청동 그릇에 글씨가 있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였다. 불발이란 부처 앞에 올리는 밥이나 쌀을 담는 굽이 높은 그릇을 말하는데 실제 이것에는 굽이 달리지는 않아 일반의 불발과는 형태가 다르나 달리 적당한 이름이 없어 불발이라 하였다. 이 불발은 정식 발굴이 끝난 후에 주변에 대한 금속탐지기 조사로 발견된 것으로 녹으로 덮여 발견 당시에는 글씨가 보이지 않았는데, 실측하느라 녹을 제거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글씨가 하나 보였다. 나무젓가락을 뾰족하게 깎아 녹을 조금씩 벗겨내다 보니 ‘황통십년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로 시작되는 글씨 45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사’라 새겨진 또 하나의 유물을 찾아낸 것이다. 박물관 자료실에서 초저녁에 시작된 나 혼자만의 판독 작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만으로는 어두워서 전선줄에 연결된 백열전구를 가까이 대고 글씨를 하나하나 판독 중에 눈이 뻐근함을 느껴 손으로 눈을 비비다가 깜짝 놀랐다. 눈이 밤알처럼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 손에 느껴졌다. 거울을 보니 내 두 눈이 그야말로 빠져나올 듯이 퉁퉁 부어 있었고, 금방 빠져나올 것 같은 눈망울에서 두 눈동자는 더욱 뾰족하게 솟아올라 마치 생쥐 눈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이 새벽 4시였다. 글씨 45자는 모두 확인되어 이미 노트에 옮겨 적은 뒤라 급히 철수하고 눈을 감고 한동안 푹 쉬었다. 다행히 실명은 하지 않았고 쥐눈 같았던 나의 두 눈은 며칠 지나서 가라앉았다. 그리고 불발 사진과 함께 흥덕사지가 재확인되었다는 보도가 나갔음은 물론이다. <4부에서 계속>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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